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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은 태양왕 루이 14세가 지은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궁전은 궁전이 되기 이전에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터에 지은 작은 저택이었다. 루이 13세는 베르사이유 숲에서 자주 사냥을 했는데, 사냥을 하다보면 하루해가 금새 저물기 때문에, 잠도 자고, 사냥 중에 쉴 수도 있는 작은 저택을 지었던 것이다.


[루이 13세가 베르사이유 숲에 지었던 사냥터의 저택 - 첫번째 확장 이후 ]


루이 14세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사냥을 무척 좋아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냥터의 저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더 공사를 크게 벌려간다. 처음에는 왕의 별장처럼 때때로 사냥을 하러왔을 때 머물거나, 손님을 초대해서 파티를 하는 용도로 쓰였다. 프랑스의 왕은 자신의 소유로 있는 궁전부터 위의 사냥터에 있는 작은 저택등 수 많은 집을 물려받는데, 수도 파리의 궁전과 그 주변의 궁전이 명실공히 나랏일을 보는 왕의 궁전이고 다른 집들은 별장의 개념이었다.

1661년부터 확장을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궁전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는 1664-1668년경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조경작업도 시작을 해서 프랑스 정원의 특징인 지평선을 향하는 원근법(perspective)이 정원과 대수로를 통해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왕의 아파트와 왕비의 아파트를 잇는 테라스가 '유리의 갤러리'를 대신하고 있던 시기이다. 숲도 여전히 남아있고, 아직 도시가 조성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있는 건물(grotte de Thétis) 지붕에 물을 모아둔 저수조가 있는데, 수압을 이용한 분수를 만들기 위한 장치이다.


[피에르 빠뗄 (Pierre Patel)이 그린 베르사이유 1668년]


그런데,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점차로 크게 확장하며, 1682년부터는 그 궁전에서 나라일을 돌보게 된것이다. 이것은 왕이 정사를 보는 궁전, 요즘 말로는 행정중심지를 옮기는 것에 해당하고, 더 나아가 큰 숲의 한 가운데 있던 베르사이유 궁전을 중심으로 행정신도시를 만든 것이었다.


[피에르 드니 막땅 (Pierre Denis Martin, 1663-1742)이 그린 1722년경의 베르사이유 궁전 ]


왜 루이 14세가 중세시대로부터 오랜동안 수도였던 파리의 궁전, 루브르를 버리고 베르사이유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루이 14세가 10살경에 겪었던 '프롱드난'이 하나의 이유로 설명되는데, 루이 14세가 어릴때, 삼촌 즉 루이 13세의 동생이 귀족들과 섭정을 하고 있는 안 도스트리슈(오스트리아인)와 그녀를 도와 수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추기경 마자랑(이태리인)을 상대로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켰었다. 당시의 난으로 루이 14세와 안, 마자랑은 한겨울의 새벽에 루브르를 급하게 빠져나와 생제르망앙레 궁으로 피신을 했는데, 그날의 공포가 어린 루이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파리를 위험한 도시로 멀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강한 충격이 있는데, 바로 루이 14세가 20대의 젊은 시절에, 수상의 자리를 노리던 당시의 재정장관 니꼴라 푸케가 왕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위해 자신의 성에 초대해서 극치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파티를 여는데, 왕을 강하게 자극하는 효과를 확실하게 준 것이다. 푸케의 성과 파티는 루이 14세를 이렇게 자극했다 : '감히 어떻게 왕보다 더 화려한 궁전을 가지고, 이렇게 화려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 자극으로 푸케는 국가 재산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쓰고, 재정장관에서 추락해서 감옥신세를 지게되고, 왕은 푸케의 성 '보 르 비꽁뜨 (Vaux-le-Vicomte)'를 짓는데 일한 건축가(루이 르 보, Louis Le Vau), 정원가(앙드레 르 노트르, André Le Nôtre), 화가(샤를 르 브렁, Charles Le Brun)를 모두 불러다가 베르사이유 궁을 짓게 한다.(세사람의 성에 모두 '르'가 들어가서 세명의 '르'라고도 한다.) 


[니꼴라 푸케가 지은 보르비꽁뜨]


물론, 왕이 수도를 옮기는데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이유들을 대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것 말고도, 루이 13세의 저택이 있던 당시 그 주변의 물레방아에서 루이 14세가 젊은 시절 만난 애인과의 추억이 또 하나의 이유로 덧붙여지기도 한다.

어쨌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아버지의 추억이 깃든 저택을 씨앗으로,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모두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궁전이 바로 베르사이유다. 루이 13세가 지었던 저택의 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있다. 루이 14세는 춤 이외에도 건축과 조경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조경가였던 르 노트르는 왕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건축가와 조경가는 매일매일 왕을 만나서 작업을 보고하는 특혜(왕의 매일 만날수 있는)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루이 르 보는 1670년에 생을 마감하는데, 그 뒤를 이은 건축가가 바로 '줄 아르두앙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로 그가 프랑스의 건축 특징인 '망사르'지붕을 만든 건축가(프랑수와 망사르)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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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의 진화를 보여주는 비디오 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N2hoOMmXeyk